인생은 가슴이 뛰는 곳
진정한 인문정신을 가지고
삶과 예술을 사랑하라

문화예술 도시에 걸 맞는
인프라와 시설투자 필요

전문가의 다양한 현장 참여
도시문화의 수준 끌어 올려

권진상 거창예총 R&D위원장·미학박사.

누구에게나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을 겁니다. 어린 날의 한토막이 성장의 한 축이 되었던 경험일터지요. 현재 거창중앙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인 필자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날 옆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마당과 곳간채가 있는 부유한 집이었습니다. 그 집 곳간채에 딸린 방에는 ‘진호’라는 머슴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150㎝ 정도의 작은 체구였지만 무척이나 힘이 세고 부지런하여 그 집의 농사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저는 겨울이면 동무들과 따뜻하게 군불을 땐 진호 아저씨 방에서 자주 놀았습니다. 그 방에는 밀레의 인쇄본 ‘만종’과 ‘이삭줍기’ 작품이 벽에 걸려있어 무척이나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날 타작하는 장면을 그리며, 미술 교사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색이 바랜 그 그림을 지금도 보고 있으면 미적 체험과 예술교육이라는 말의 의미가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빛처럼 다가옵니다.

교육이란 ‘가르치고(敎)’ ‘기르는(育)’ 것뿐만 아니라, 라틴어에서 유래된 에듀케이션(Education)은 ‘학습자의 잠재 가능성이 발현되도록 끌어내는 것’입니다. 예술교육은 미적인 감성과 창의적인 소질, 그리고 천재성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안내하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프라그머티즘 미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에서 “교육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배움”이라며 “미적인 경험과 예술은 훌륭한 배움의 경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듀이는 예술 행위와 미적 향유가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을 통한 성장의 원천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술교육은 엘리트만을 길러내어 그들만이 전유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술교육은 생활 속에서 예술을 찾고 안목을 갖춘 문화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날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문화예술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적인 인간을 위한 창의적인 예술교육을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르네상스 정신으로 우리의 삶을 재생시켜야 할 것입니다.

미학미술사를 통한 미술비평의 매력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종’은 황혼녘에 한 남자와 여자가 삼종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저는 서양화와 미술교육을 전공했는데 학부 2학년 때 미학개론을 수강하면서 ‘미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미학은 라이프니츠 볼프학파 철학자 바움가르텐(A.G. Baumgarten, 1714~1762)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초보적이지만 공부를 하면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미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1790)에 나오는 미적판단의 속성 중 ‘무관심적 관심’,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개념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미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모더니즘 미술(Modernist Art)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저는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했던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와 마이클 프리드(MichaelFried, 1939~ )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평론가에 대한 관심은 미학과 미술사 방법론을 통해 비평을 공부하게 되었고, 창작자와 감상자를 소통하고 연결하는 매개 역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미술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 상황이지만 미학이라는 학문은 다소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론적인 실증에 따른 연구가 미술사학이라고 한다면, 미학은 미의 이념과 예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하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야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 고증된 유물과 작품에 대한 가치를 미술사적으로 밝혀내고, 미적인 감정의 문제를 감성적인 인식과 안목으로 조명하여 공감 가치를 끌어내는 것이지요.

인문정신을 통한 문화발전

최근 르네상스 아카데미의 자문위원인 빈빈문화원 김종희 이사장의 강연이 생각납니다. “인생은 가슴이 뛰는 곳, 뜨거운 곳을 향해야 한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므로 순간순간을 애틋하게 아름답게 아찔하게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진정한 인문정신을 가지고 삶과 예술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인 이념이 200여 년이 지나 그의 자손 겸재 정선에게 전해져 ‘계상정거도’ 속에 담아내듯이 인문적 가치는 시대를 관통하여 흐릅니다. 10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처럼 위대한 예술과 철학 그리고 문학은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배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게 될 것이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듯이 내용과 개념을 충실하게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문학이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농부가 밭을 갈듯이 성실하게 ‘일구어야(cultivate)’ 합니다. 문화(culture)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예술을 가슴으로 느끼며 감성으로 감동해야 합니다. 예술은 비극과 시련에서도 희망을 찾아 꿈틀거리는 세계이며, 그 자체로서 완결된 형식을 갖춘 것으로 오직 인간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결정체입니다.

예술문화는 투자한 만큼 이상의 결과를 뽑아내는 경영학적인 사업시스템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예술문화란 우리의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산업사회의 발전 논리와 상품의 가치로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국제미학회에서 뉴욕시립대학 노엘 캐럴 교수님으로부터 예술의 가치와 중요성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작(原作)에 아우라(aura)와 오리지넬리티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복제 문화를 경계해야 한다”

품격있는 문화예술 도시 창조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은 추수가 끝난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나이 든 세 농촌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거창에서 인문과 예술에 관심이 있는 지인들과 함께 2007년 ‘르네상스아카데미’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한국미술사, 서양미술사, 도시환경디자인, 실내외 건축디자인, 근대서양문학, 복식디자인 등에 대하여 함께 공부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해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2020 공공디자인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함께 수행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시민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게 했고, 마을 주민이 자존감을 느끼고 품격 있는 도시를 만들어 가기 위해 모범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때로는 인문학자를 초빙하여 시민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의 품격과 가치를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거창예총에서 ‘거창예술포럼’을 진행했습니다. 창작 전시회와 공연 등으로 행해지는 예술 창조행위에 대하여 이론적인 가치와 개념을 정립하고, 행정과 시민사회가 공유는 공감대의 장 또한 중요합니다. 지역 문화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점검하고 문화예술 도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가야 합니다. 품격있는 문화예술 도시로의 발전은 문화예술 주체자와 시민의 건강한 안목, 그리고 탄력적인 행정이 유기적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지역의 문화예술은 동시대 시민들과 함께 공감하여 훌륭한 문화정체성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창은 인접 시·군에 비하여 인적 인프라가 상당히 튼튼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쟁력 있는 교육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술 전공자들의 층이 두꺼운 상황이며 전문가들이 어떠한 혜택을 구가하지 않고 이곳 거창의 문화예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도시에 걸 맞는 인프라가 무척이나 열악한 실정입니다. 문화인으로서의 소양을 다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행정에서 적극적인 인프라 시설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지역사회의 대중은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다양한 현장으로의 참여를 원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상호 소통으로 도시문화의 퀄리티를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